영화란 놈은 미인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일단 가수는 가창력이 중요하다고 말한 뒤 귀여운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는 연기가 되어야지 라고 말하고 정작 표를 끊을 때는 이왕이면 예쁜 사람이 나온 영화를 찾는다. 이건 당연한 현상이고 생각만큼 비도덕적이거나 천박한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예쁜 외모는 종종 훌륭한 연기만큼이나 훌륭한 표현수단이 된다. 가장 뻔한 예를 보자. <로마의 휴일>의 공주 역을 표현하는 데 메소드 연기자의 예술혼이 불타는 연기가 필요한가? 아니면 오드리 헵번의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요정 같은 외모가 필요한가? 정답은 명백하다. 좋은 외모는 영화에서 연기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미모가 영화의 표현력에 큰 공헌을 하지 않는 경우라면 어쩌냐고? 일단 그런 경우는 잘 없을 뿐더러(아름다운 외모는 아무튼 기분이 좋아지려고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의 기분을 좋게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표를 파는 것만으로도 분명 제 역할을 한다. 엄청 불공평한 얘기지만 할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좋은 외모의 스펙트럼이란 게 생각보다 꽤 넓고, 지금도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태희나 장동건은 분명히 미인이지만, 그들에 비하면 표준적인 미모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공효진이나 이준기도 미인이다. 그리고 보통 미인이라 일컬어지지 않는 배우들도 연기를 통해 아름다워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썩 그렇게 보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쥐>의 송강호가 섹시하다고 하고, 이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거의 모든 영화에서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한다.-.-;;;
미인의 범위는 얼굴의 형태나 연기력으로 넓어질 뿐 아니라 나이에 따라 넓어지기도 한다. 보통 미인이라면 20대 젊은이가 얼른 떠오르게 마련이고, 20대가 지난 수많은 배우들은 필사적으로 20대처럼 보이려고 보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의 얼굴에 밴 세월의 흔적은 새파란 젊은이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움을 캐치해내고 느끼는 센스는 일반적으로 여자 쪽이 나은 것 같다. 블로그스피어만 봐도 미중년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아도, 그만큼 미중년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찾기는 초큼 힘든 걸 보면 말이지.
별 쓸데도 없는 말이 길었는데...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미중년을 좋아하는 여자가 많다는거다. 당장 생각나는 스타들만 들어봐도 제레미 아이언스(영원한 미중년의 아이콘),양조위(이 분도 어느새 '중년'이란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셨다), 콜린 퍼스(미스터 다시), 앨런 릭먼(해리포터 시리즈가 힘이 세긴 세다), 유덕화(근 30여년 동안 변함없이 간지폭풍) 등등. 그 뿐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를 연인으로 보여주는걸 전혀 꺼려하지 않았던 고전 할리우드 시기의 남자 주인공들은 많은 경우 중년의 나이로도 여성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저씨 딱지를 붙이긴 어정쩡하게 젊지만, 훌륭한 중년으로 진입하고 있는 분들도 많다. 당장 요새 울버린으로 나오는 휴 잭맨이 그렇고, 작년에는 놀랍게도 재기불능인 줄 알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으로 돌아왔으며, 젊은 시절 너무 예쁜 제비 같았던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침착한 중년의 포스를 보여줬고, <적벽대전> 시리즈의 의의는 그 느끼미남 금성무가 훈훈한 중년으로 자라는(?) 중이라는걸 보여줬다는 데 있었다.(...)
근데 여기서 하나 이상한 것. 이 기나긴 미중년 리스트에 한국 배우는 없다.-.-; 몇몇 사이트에서 한국의 미중년이 누구일까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들을 본 적이 있는데, 이런 토론 때 등장한 이름들이 천호진, 김갑수, 안성기 등등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흠. 이 배우들은 모두 물론 멋있고 매력있는 사람들이다(<잠복근무>에서 노타이 수트차림으로 나오는 김갑수가 얼마나 근사한지,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고민하는 천호진의 커프스 링크가 얼마나 그럴싸한지, <무사>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안성기가 얼마나 간지나는지 dvd 있는 분들은 함 확인해 보시길 촉구한다.). 근데 젊은 여성들이 이들을 제레미 아이언스나 양조위 같은 등급의 미중년으로 보고 있나? 흠...아닐걸. 여성들에게 이들이 미중년 스타로 어필할 수 있을지 점검해 보려면 이 배우들을 주연 삼아 한국판 <데미지>나 <색, 계>를 기획하는 게 가능할지 상상해 보면 된다. 내 생각엔...망할 것 같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이 분들을 미중년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치더라도 그 리스트가 너무 짧다. 한국영화계는 미중년 기근인거다. 한국의 미중년으로 젊은 여성들이 꺅-소리 내며 좋아하는 스타가 딱 한 사람 있긴 있다. 바로 손석희. 하지만 이 분은 배우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잖아.orz 사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은 손석희 씨에게 미중년 스타의 책임까지 지우는건 좀 너무하다.
왜 한국에는 미중년이 없는걸까? 그 이유를 누군들 알겠냐만 난 한국남자배우들이 그냥 나이를 먹는 대신, 아저씨로서 나이를 먹는 게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건 배우 개인뿐만이 아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이든 사람이 여유를 갖는 대신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찌부러지고, 우아하게 정치적 공정성을 드러내는 대신 '남자다운' 마초가 될 것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나이먹는 사람들이 미중년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건 다소 극단적인 예고, tv의 경우긴 하지만 최수종은 아저씨로 나이든 대표적 경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90년대에는 예쁜 쌍꺼풀과 고운 얼굴선을 자랑하는 청춘스타였지만, 가족을 먹여살리는 데 지친 가부장들의 '늠름하고 능력있는 남자'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사극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방송국 연말 연기대상을 챙기는 대신 촌스런 아저씨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지금 그런 최수종을 미중년으로 보는 여자가 몇이나 있을까?(<해신>에서 끝도 없이 회상처리된 최수종이 수애와 포옹하는 장면...아주 오그라든다. 불쌍한 수애...;) 그리고 다른 한국 남자배우들도 정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이미지를 안고 지친 아저씨, 심지어는 어르신으로 나이들어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치면 지금 당장 한국 영화에서 미중년을 찾는건 부질없는 노력일거다. 그래도 미래는 밝다고 말하고 싶은게 앞으로 한국영화계에 미중년으로 나이들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들이 꽤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바뀌는거랑 관계가 있겠지. 남자들이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가족 먹여살리는 가장' 역할에 덜 짓눌리고, 남자 배우들도 목에 힘주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나이들기를 덜 강요받고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변화의 냄새를 확 느낀게 <놈놈놈>의 정우성의 모습이었다. 90년대에 이 배우는 한국에서 '먹고 살기'나 '조국의 미래'가 아닌 '자유로운 영혼' 따위의 허접한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게 최초로 가능해진 X세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즉, 그는 새로운 세대로서 심각함과 남자의 책임에 목숨 거는 한국 아저씨의 기질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놈놈놈>에서 서른다섯살이 되어 아저씨 혹은 중년에 가까워진 이 배우의 모습은 여전히 한국아저씨적 심각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그 나이에도 스물네살 때 <비트>에서 손 놓고 오토바이 타던 '자유로운 영혼'의 간지로 말에서 총돌리기를 보여줬고 그 결과 20대의 환호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정우성은 여유를 갖고 아름답게 나이드는 미중년에 진입할 준비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정우성이 나이가 들면서 최수종처럼 사극에 박통 닮은 장군으로만 나왔다면 지금 같은 미중년 초년으로 느껴질까? 아닐 것 같다. 설령 그가 지금과 똑같이 예쁜 얼굴이더라도 말이지.
물론 모든 남자배우가 정우성 같은 행운을 누리는건 아니지만, 미중년이 될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들이 꽤 많이 보이니 기쁜 일이다. 이 대열에 제일 먼저 나와야 하는건 물론 이 분.

TV에 비해 영화 쪽이 괴상하게 안풀리긴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빼면 정말 좋은 미중년 영화배우가 될 것 같은 명민좌.
이병헌도 김지운의 간택을 받은 덕분에 느끼한 이미지가 꽤 멋지게 바뀌어서 곱게 나이들어가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 중년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젊은 배우들 중에서도 10년, 20년 후가 기대되는 사람들이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본다고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스타들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
지금 이들은 예쁘고 약간은 얄팍한 아이돌 배우에 가깝지만, 스스로가 촌스런 아저씨로 늙어가지 않을 의지를 갖고 있고 침착하게 경력을 쌓아나간다면 10여년 뒤 훌륭한 미중년으로 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그 때 20대 여성들(지금 초등학생, 중학생쯤 되려나)이 이들을 우리가 제레미 아이언스나 양조위를 좋아하듯 좋아한다면 그것도 한국영화판의 큰 자산이 될거다. 난 진심으로 이 배우들의 지금 모습보다 10년 후 모습이 훨씬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