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한국영상자료원의 <청춘의 십자로> 재공연을 보고 왔다. 입소문대로 너무나 신나고 독특한 '경험'이어서 비를 쫄딱 맞고 돌아오는 길에도 기분이 좋더라고. 이히. 관람이 아니라 경험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만큼 이 공연은 단순한 영화의 상영을 넘어선 다양한 체험을 제공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30년대 주전부리 장수들(배우이신지 영상자료원 직원분이신지는 잘 모르겠다)이 관객들에게 사탕과 영화 리플렛을 나누어 주면서 바람을 잡는데, 이미 상영 전에 그렇게 30년대를 흉내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부터가 독특한 체험이다. 본 공연에서는 라이브 악단의 연주와 변사의 해설과 뮤지컬 배우의 노래와 무성영화 상영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는 작은 실험극까지 있다. 평소 같으면 한 번에 한 가지만 봐도 충분한 다종다양한 매체가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관객을 자극하는 거다. 게다가 이 매체들은 한 시대에 종속된게 아니고, 30년대의 충실한 재현부터 현대적 실험까지 긴 세월을 커버하기까지 한다. 그런만큼 이 공연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흥분된 열기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공연이 산만하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많은 매체들이 벌이는 실험은 철저히 <청춘의 십자로>라는 무성영화에 종속되어 있으며,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매끄럽게 흘러간다. 아마도 이 공연 제일의 목표는 30년대의 영화 관람 체험을 역사에 (나름대로)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을거다. 그래서 이 공연은 30년대를 열심히 베껴내면서도 지금이 2000년대라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우선 영화 관극을 이끌어가는 변사의 존재 자체는 분명 30년대의 재현이지만, 그의 코믹한 나레이션은 영화 <청춘의 십자로>와 관객 사이의 엄청난 시간적 간극을 열심히 메꿔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웃기는 아이라인을 변사가 놀리는 것은 이 생경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부담감을 중간에서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변사의 주관적인 해석은 무성영화 시대 영화 상영의 당연한 관습이었으니 현대적 해석을 가미하는 해설 자체가 30년대의 재현이기도 하다. 영화 시작 전 연극이 활동사진(?)으로 전환되는 실험극도 이렇게 시대를 오가는 이중적 특성을 보인다. 이 작은 실험극은 형식상으로는 연극과 활동사진이 결합된 연쇄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도 같지만, 연쇄극과는 별 관련이 없는 현대적 퍼포먼스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은 참으로 고풍스럽게 들리지만 사실은 불과 몇 달 전 공연을 위해 최신곡이다. 이 공연은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70년의 간격이 있는 두 시대가 연결되었다 떨어졌다 하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영화 자체는...여러가지로 신기해서 거의 신선할 지경이다. 경성에 상경한 시골청년들과 이들을 등쳐먹는 모던뽀이의 갈등을 다룬 줄거리는 근대화가 시작되던 당시의 시대상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엄청 초라한, 그리고 세트가 아닌게 분명한 시골풍경과 서양풍 신문물이 가득한 서울 풍경의 대조도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던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려낸 것이었을거다. 난 모던보이 개철(계철인가?)의 양장;과 화려한 집이 꽤나 보기 즐거웠다. 연출의 면에서도 이 작품은 나름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한다. 솔직히 말해 굴러가는 사과 메타포와 여체를 훑는 섹쉬한 카메라워크에선 완전 폭소하고 말았지만, 그런 연출이 지루하지 않다는건 확실하다. 후반부의 잽싼 카메라워크나 거울을 이용한 촬영 같은건 지금 기준으로도 세련된 것이고 말이다. 한편으로 무성영화다운 연출은 무성영화답게 독특한 재미가 있다. 주인공 친구가 '비극'을 글로 써서 보여주는 장면에선 역시 웃어버렸지만 소리 없이 이야기의 포인트를 전달하기 위한 절박한 몸짓으로 보여 짠하기도 했다. 인물들의 표정을 화면 가득 담는 빈번한 클로즈업도 유성영화와는 다른 재미를 주고 말이다. 이만큼 역동적인 공연을 보고도 이렇게 추상적인 단어로밖에 감상을 표현하지 못하는 단조로운 글솜씨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아무튼 요점은 이거다 -> 꺅-이거 완전 신난다! 강추! * 공연 진행을 사실상 짊어지다시피 한 변사 조희봉은 정말 훌륭하다. 공연 끝나고 너무 수고하셨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을 정도. 근데 이 배우는 <삼거리 극장>의 일본헌병 역, <원스 어폰 어 타임>의 독립군 워나비 역, 이번 변사 역 등등 '모던'한 역할을 도맡아 하는 듯.^^ * 공연 시작 전에 이번 공연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다. 사진으로만 얼굴을 봤던 분인지라 확실하진 않지만... * 인기가 많았던 공연이라 이런저런 행사 때 재공연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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